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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Other movies

2013년작 미드 <렉티파이> - 정류하다, 바로잡다


<렉티파이>의 오프닝 화면은 이야기의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짧은 화면입니다.

유심히 봐두면 제가 하는 이야기가 이해가 갈 것입니다.

매 에피소드마다 나오니 자동으로 그림이 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즐겨보는 이유 중에 하나는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일 겁니다. 

그런데 <렉티파이>는 이런 미드의 속성과는 정반대에 서있는 미국 선댄스 채널의 2013년작 미드입니다. 

극적 변화가 적고 매우 긴 호흡으로 잔잔하게 스토리가 흘러갑니다. 

에피소드는 한시즌에 6개 밖에 안되지만 스토리 전개가 워낙에 느린 편이라서 체감 상으로는 에피소드가 

12개는 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렉티파이>는 수사가 빨리 진행되는 수사물도 아니고 막 피가 튀기는 좀비영화도 아니고

똘아이 사이코패스가 나오는 범죄 영화도 아닙니다. 뒤에도 이야기하겠지만

그래서 저에게는 어! 미드에도 이런 소재도 다루네? 라고 신선하게 다가 왔습니다.

저는 현재 외국에 거주하고 있고 한국처럼 인터넷을 자유롭게 쓴다던가 TV를 맘대로 볼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제가 구한거나 지인들이 가져다준 미드를 볼 수 밖에 없는터라

시즌 2까지 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ㅠ.,ㅠ



<렉티파이>의 주요 내용은 여자친구였던 한나 딘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대니얼 홀든이 풀려나면서 벌어지는 일들 입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대니얼 홀든은 20년 전, 당시 여자 친구였던 한나 애비게일 딘이 

살해된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되죠. 

그리고 자신이 여자 친구를 살해했다는 자백을 하고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리고 20년만에 여동생, 아만다의 노력과 아만다의 애인이자 변호사인 존 스턴의 도움으로 

증거불충분(정액DNA)으로 풀려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렉티파이>의 주인공 대니얼 홀든



대니얼 홀든의 여동생, 아만다 홀든



아만다의 애인이자, 대니얼의 변호사인 존 스턴



대니얼의 어머니인 자넷 탤봇


이복동생인 테드 주니어와 아내 토니


누나 아만다와 대니얼(막내)




<렉티파이>는 겉으로는 주인공 대니얼 홀든이 정말 한나 딘을 살해했는지 진실을 추적해나가는 

심리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심리 스릴러보다는 휴먼드라마에 가깝습니다. 

대체로 스릴러 장르의 드라마들은 <렉티파이>와 같은 소재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갇힌 주인공이 

풀려나는 과정을 극적으로 다루거나, 범인의 정체를 밝히고 주인공의 명예를 되찾는데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는 AMC 드라마 <킬링>처럼 베일에 가려져 있는 범인을 끝까지 추적하여 정의를 구현하는 스토리로

진행되곤 합니다.

 

그러나 <렉티파이>에는 시종일관 주인공인 대니얼 홀든의 시선에 맞춰 흘러갑니다. 

대니얼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어떤 심리상태인지를 보여주는 데 주력하죠. 20년만에 수감생활을 

마치고 바깥세상으로 나온 대니얼은 자유를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워 합니다. 

마치 20년 전의 시간에서 멈춰 있는 듯한 행동을 보이죠. 

워크맨과 같이 자신이 수감되기 전에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꺼내, 예전 방식 그대로 사용하면서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합니다. 비단 습관이나 행동뿐 아니라 머릿속까지 16살의 대니얼 홀든에서 

멈춰져 있는 것이죠.

그런데 한순간에 자기의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물건들을 창고에서 모두꺼내 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더이상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 의지죠.


이렇게 <렉티파이>가 한나 딘을 누가 살해했지는 밝혀내기보다는 대니얼의 신변잡기 위주로 

스토리가 진행되는 이유는 이 드라마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대니얼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19년간 독방에서 지내며 보지 못한 창가의 눈부신 햇살이나

너무나 평범히 할 수 있는 잔디밭에 누워 보는 일, 어릴쩍 먹었던 사과튀김이 먹고 싶고

자동차들이 각지지 않고 둥글둥글 해졌다는 말을 주고 받는 것이 참 마음에 아~ 그래 그럴꺼야!

라고 공감하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대니얼의 모습에 투영시킨 사람들의 낙인과 편견,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대니얼이 항소심에서 무죄를 판결 받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류의 내용을 볼때마다 생각드는 것이

어느 하나의 범죄자가 이르키는 문제들은 이해가 갈때가 있습니다. 뭐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는

그런데 한명이 아니라 단체나 한 사회집단 자체가 그 범죄를 이르키고 덮고 하는 행동은

참 경멸스러울 정도로 구역질 나는 일입니다. 

그 또한 사회적 문화적 차이라 할 수 있겠지만 최근 우리나라 한국도 그런 이상한 현상들이

때때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는 20년간이나 살인자였고, 여전히 살인자인 것이죠. 

대니얼에게 찍힌 살인자란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경계하고 멀리합니다.

 


오로지 대니얼이 의지할 사람들은 가족들뿐이지만 가족들과의 관계도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이복동생인 테드 주니어는 마을 사람들처럼 대니얼을 살인자라고 생각하는 데에다가 한 술 더 떠 

대니얼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비웃고 경멸하기까지 합니다. 

고등학생인 테드의 남동생 자레드는 집에서는 대니얼에게 최고의 친구가 되어주지만 밖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서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이고 대니얼은 그런 

그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오직 어머니인 자넷과 여동생 아만다만이 대니얼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지만 그의 눈높이에서 

그와 어울리고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대상은 아닙니다. 

결국 대니얼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인 셈이죠. 오직 혼자의 힘으로 세상의 편견과 맞서 

살아남아야 하는 겁니다.



이런 대니얼의 모습들은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서, 무죄가 밝혀진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이고 현실에서조차 사람들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감된 사람이 무죄가 

밝혀지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까지만 관심을 가지고 지켜봅니다. 

무죄가 밝혀지고 보상을 받고나면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대니얼과 같은 이들에게는 아직도 해결해야할, 남아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세상의 편견과 낙인을 극복해 나가야하고 지나간 세월을 따라잡아 새로운 사회에 적응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아직 해결해야할 일이 남아있는 지도 모릅니다. 

이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이들이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사회적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 말입니다.

얼마전 지적장애인들에 대해 비하 발언을 통해 그들의 부모들이 무릎 꿇고 호소하던 사건이

생각나네요 그 어머니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무릎꿇게 만듭니까? 무슨권리로?

어것은 순전히 개인주의고 사회부적응자들이라 말 할 수 밖에 없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싸늘한 시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은 대부분 낙오자나 

무능력자라는 딱지가 붙게 되고 사회적 시스템에서 밀려나 버리는 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모든 책임은 그들의 잘못으로 여기지만 정말 우리 사회에는 책임이 없을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99%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맞춰진 사회적 기준을 1%의 조금 다른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들은 위한 시스템을 마련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99%를 위한 사회가 아닌 100%를 위한 사회를 위해서 말입니다.


http://icefog.tistory.com/24의 리뷰를 참조 하였습니다.